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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18을 왜 폭동반란이라 부르는가
글쓴이
 만토스  / 2014-10-02  / 110.13.151.3
5.18은 북한 主演 남한 助演의 폭동반란


북한주도의 5.18폭동반란을 왜곡 날조하고 인민재판으로 국군에게 내란죄를 뒤집어 씌운 역사를 어찌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김일성의 북한군이 주도한 폭동반란이 민주화 운동이라면 그것은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는 운동이다. 내가 왜 5.18광주에 북한군이 주도했었고 그런 폭동반란이 민주화 운동이라 할 수 없는지를, 이제부터 몇 가지 이유를 적고 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추가하여 설명해 보려 한다. 5.18을 폭동반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나의 의문점에 시원한 답을 해야 할 것이고 원한다면 끝장 토론도 환영하는 바이다.


폭동반란 증거 1 – 전라도지역 38개의 무기고를 단 4시간 만에 모두 털어 무기탈취

1995년 7월18일 검찰이 내 놓은 ‘5.18관련사건수사결과’보고서와 1985년에 안기부가 작성한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을 보면, 1980년 5월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4시간 대에 17개 시와 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 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탈취당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렇게 전광석화처럼 수 많은 무기고를 털어 탈취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을 두고 각 무기고의 세부 정보를 미리 탐색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5.18이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무장폭동이었다는 정황이 설명되는 부분이다. 간첩 서경원이 사전에 전라도 무기고들을 모두 파악해 두었고 북한군 지휘하에 5월21일 순식간에 탈취한 것이다. 북한 주연 남한 간첩과 폭도들의 조연작품이다.


폭동반란 증거 2 – 연고대생  600명, 그들이 북한군이다

1) 5월21일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가 광주공단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한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했고 그 차량들이 정체불명의 시위대 300명을 태우고 아시아 자동차공장에 도착하였으며, 이들과 또 다른 300명은 고속버스를 타고 그곳에 합류한다. 도합 600여 명이 무기탈취의 현장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 집결했다. (서울지방검찰청, 1995. 92-93)

2) 5월21일 9시45분경: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300여명이 잽싸게 승차하였으며, 이들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다시 가서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 등 모두 80여대를 징발, 차량에 가득 탄 중.고생과 젊은이들은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고 각종구호를 외치며 오전 중에는 외곽지역의 시민들을 동원하여 수송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84)

3) 5월22일 0750분경: 폭도 300명 탑승한 군용차 45대 송정리역 집결, 공포발사.
(전교사 작전일지)

4) 5월22일 0750분경: 광주시민들을 길거리로 이끌어 냈다는 전옥주의 선무방송은 연고생 300명이 송정이 쪽에서 오고 있다고 방송한다. 후에 전옥주는 모든 선무방송 내용은 누군가가 전해준 쪽지에 의해 읽혀졌다고 한다. 당시에 광주의 증심사라는 절에는 간첩 손성모가 승려로 위장하고 북한군의 광주 침투를 안내했었는데, 김대중은 그를 2000년 6.15에 북한 김정일 품에 안겨 준다.

5) 북한도서 “광주의 분노”는 시민 군 600명이 21일 오전 9시부터 무기탈취를 시작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 때부터 봉기 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량 공장 인 ‘아시아 자동차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 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뢰획하였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조선로동당출판사, 1985, 34-35)
연고대생 600명, 그들이 300명 단위의 북한 군이다.



폭동반란 증거 3 – 신원미상의 시체 12구가 지금도 5.18묘지에 묻혀 있다  

김영삼 정부하에서 5.18 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지정하고 그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법으로 선포한 후로 당연히 피해당사자 혹은 그 가족들로부터 사망자와 부상자들에 대한 신고를 받아 법에 따라 보상을 했었는데도, 1995년 이후 유전자 분석에 의한 신원파악이 이미 발달된 시대여서 아직도 신원미상의 시신이 12구나 그대로 5.18묘지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 가족이 성스러운 민주화 운동 피해 당사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니 당연히 신원이 파악되어야 했는데, 연고자가 없으니 그들은 모두 북한군이다.


폭동반란 증거 4 – 5.18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광주시민 중에 69%가 시민 군이 쏜 총기에 사망.

대한민국 검찰이 두 번에 걸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망한 민간 및 신원 불상자 166명 중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116명, 이 중 계엄군이 보유한 M-16소총으로 사망한 사람은 36명뿐이고 나머지 80명은 모두 카빈, M-1, AR자동소총, LMG, 공기소총 등 무기고에서 탈취된 총들에 의해 사망했다. 대체 누가 광주시민들 80명씩이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로 총격을 가해 사망하게 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두 가지일 것이다.  시민 군 총격 사망 사건은 광주시민들의 자작극이거나, 아니면 광주에 내려 왔던 북한군에 의한 총격살해가 그것이다. 그런 자작극의 목적은 뻔하다. 시위 중 사망자가 되도록 많이 발생토록 하고 그 학살을 진압국군에게 뒤집어 씌워 광주 시민들이 국군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기 위한 전략적 자작극으로 의심되는 부분이다. 80명의 광주시민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 시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면, 총을 쏜 자는 모두 북한군이다.  


폭동반란 증거 5 – 무장 시위대의 광주교도소 습격

그 해 5월 21일에는 충격적인 교도소 습격 사건이 무장시위대에 의해 6차례나 저질러 졌다. 광주교도소에는 당시에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복역 중이었고, 총 복역수가 2,700명이었다고 한다. 시민군이 복면을 쓰고 장갑차를 앞세워 총 6차례나 교도소를 습격했었고 쌍방간에 피해가 가장 심한 사건으로 기록 되었다. 시민 군 사망자만도 28명이었다고 한다. 대체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시위대가 무슨 이유로 그토록 극렬하게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 많은 간첩들과 좌익수들을 교도소에서 빼 내려고 한 짓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민주화 운동이다. 교도소를 파괴하고 죄수들을 풀어 주려 했던 폭동이 민주화인동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면, 교도소 습격한 폭도들은 모두 북한군이다.


폭동반란 증거 6 – 5.18의 대한민국 측 助演들 모두 종북 반 대한민국 세력

5월19일부터 21일까지 광주를 휩쓸어 경찰과 진압계엄군마저 혼비백산케 했던 북한군(만일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귀신이라고 부르자)의 역할은 광주에서의 폭동반란이 확산되어 겉잡을 수 없게 되고 그 기세가 전국으로 퍼지게 하는 것이었다. 신출귀몰한 북한군을 빼고 나면 5.18조연출자들이 드러난다. 황석영, 윤기권, 윤이상, 김대중, 문익환, 서경원 등이다.

황석영: 그는 1989년 3월 20일 북한에 밀입국하여 1993년 4월 29일 귀국 체포 시까지 ‘범민련 해외본부’를 결성하고, ‘홍철’이라는 가명으로 다섯 차례나 북한에 들어 가서 김일성을 일곱 차례나 접견했고, 같은 시기에 북한에 들어와 김일성을 만났던 윤이상과 5.18광주를 주제로 한 대남-반미의식 고취를 위한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를 제작해 줌으로써 김일성으로부터 “재간둥이”라는 칭호와 함께 25만 달러라는 공작금을 받았던 반 국가사범으로, 1993년 국가보안법에 의해 징역 7년의 형을 받아 복역 중, 1998년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됐고, 5.18과 빨/갱/이들의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도 작사했다.

윤기권: 5.18당시 18세로서 5.18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5월18일 첫날 그는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경찰 15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런 공로에 의해 그는 민주화 보상법으로 2억 원이라는 높은 보상금을 받았고, 1991년 3월 월북하여 김일성 수령의 품 안에 안겼다(전남일보, 광주일보, 월간 말지에서). 그는 광주민중폭동의 영웅으로 북한 전역을 돌아 다니며 5.18간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서경원: 한명숙과 함께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신이며 5.18때에는 폭동의 한 축을 이루는 카톨릭농민회 회원이었다. 1988년 2월 그는 김일성에게 올라가 10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았었고 반공법으로 10년 형을 선고 받고 9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문익환: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그는 북한에서 ‘조국통일상 수상자’라는 글자와 함께 얼굴 초상이 50전짜리 북한 우표에 담겨 있는 전형적인 빨치산이다.

김대중: 23세 때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 1971년에 일본에서 반국가조직 한민통을 결성하여 북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반국가활동을 했고, 1997년 북한 부주석 김병식으로부터 1971년에 김대중에게 20만 달러를 공작금으로 주었다면서 그 증거를 편지로 김대중에게   전하여 과거의 행적을 공갈 협박함으로써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5억 달러라는 대한민국 국부를 갖다 바치는 일이 발생했다.  


김일성의 부름을 받고 1989년에 일제히 북한에 들어가 간첩 질 혹은 역적질을 했던 서경원, 황석영, 윤이상, 문익환 이들은 모두 김대중 내란음모 5.18폭동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거나 후에 반 대한민국 逆賊 활동이었던 5.18을 김일성과 김대중의 입맛대로 미화시키는데도 온 힘을 기울인 자들이다. 간첩과 빨/갱/이들이 주도한 폭동반란 행위를 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르는 짓은 대한민국이 健在 하는 한 받아 들일 수 없는 거짓이요 대한민국을 통째로 부정하는 叛逆이다.


이 정도의 이유만으로도 나는 5.18광주사태는 절대로 민주화 운동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바이다. 총포로 무장한 市民 軍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도조직이 국군에 맞서 전투를 감행했던 국가전복의 역사를 그것도 실패한 폭동반란 행위를 아직도 민주화 운동이라고 떠들어 대는 민주화 광신도들과 언론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향해 거짓말을 늘어 놓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1980년5.18 역사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며 그런 후에야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을 우리 입으로 따지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34년 전 自國의 역사도 歪曲 捏造된 채로 입도 못 떼는 무리들이 어찌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을 말할 수 있는가, 부끄럽다. 이상.
2014. 10. 2.  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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